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면서 피었나니 흔들리면서 줄기를 곧게 세웠나니 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랑이 어디 있으랴
젖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빛나는 꽃들도 다 젖으며 젖으며 피었나니 바람과 비에 젖으며 꽃잎 따뜻하게 피웠나니 젖지 않고 가는 삶이 어디 있으랴.......
도종환/담쟁이.....
저것은 벽 어쩔 수 없는 벽이라고 우리가 느낄 때 그때 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른다. 물 한 방울 없고 씨앗 한 톨 살아남을 수 없는 저것은 절망의 벽이라고 말할 때 담쟁이는 서두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 한 뼘이라도 꼭 여럿이 함께 손을 잡고 올라간다 푸르게 절망을 다 덮을 때까지 바로 그 절망을 잡고 놓지 않는다 저것은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 담쟁이 잎 하나는 담쟁이 잎 수 천 개를 이끌고 결국 그 벽을 넘는다
도종환/아홉 가지 기도....
나는 지금 나의 아픔 때문에 기도합니다. 그러나 오직 나의 아픔만으로 기도하지 않게 하소서 나는 지금 나의 절망으로 기도합니다 그러나 오직 나의 절망만으로 기도하지 않게 하소서 나는 지금 깊은 허무에 빠져 기도합니다 그러나 허무 옆에 바로 당신이 계심을 알게 하소서 나는 지금 연약한 눈물을 뿌리며 기도합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남을 위해 우는 자 되게 하소서 나는 지금 죄와 허물 때문에 기도합니다 그러나 또다시 죄와 허물로 기도하지 않게 하소서 나는 지금 내 마음의 평화를 위해 기도합니다 그러나 모든 내 이웃의 평화를 위해서도 늘 기도하게 하소서 나는 지금 영원한 안식을 위해 기도합니다 그러나 불행한 모든 영혼을 위해 항상 기도하게 하소서 나는 지금 용서받기 위해 기도합니다 그러나 모든 이들을 더욱 사랑할 수 있는 자 되게 하소서 나는 지금 굳셈과 용기를 주십사고 기도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더욱 바르게 행할 수 있는 자 되게 하소서
도종환/구름처럼 만나고 헤어진 많은 사람 중에...
구름처럼 만나고 헤어진 많은 사람 중에 당신을 생각합니다 바람처럼 스치고 지나간 많은 사람 중에 당신을 생각합니다 우리 비록 개울처럼 어우러져 흐르다 뿔뿔이 흩어졌어도 우리 비록 돌처럼 여기 저기 버려져 말없이 살고 있어도 흙에서 나서 흙으로 돌아가는 많은 사람 중에 당신을 생각합니다 이 세상 어느 곳에도 없으나 어딘가에 꼭 살아있을 당신을 생각합니다
도종환/벗 하나 있었으면 ...
마음 울적할 때 저녁 강물 같은 벗 하나 있었으면 날이 저무는데 마음 산그리메처럼 어두워올 때 내 그림자를 안고 조용히 흐르는 강물 같은 친구 하나 있었으면
울리지 않는 악기처럼 마음이 비어 있을 때 낮은 소리로 내게 오는 벗 하나 있었으면 그와 함께 노래가 되어 들에 가득 번지는 벗 하나 있었으면
오늘도 어제처럼 고개를 다 못 넘고 지쳐 있는데 달빛으로 다가와 등을 쓰다듬어주는 벗 하나 있었으면 그와 함께라면 칠흑 속에서도 다시 먼 길 갈 수 있는 벗 하나 있었으면
도종환/영원히 사랑한다는 것은....
영원히 사랑한다는 것은 조용히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영원히 사랑한다는 것은 자연의 하나처럼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서둘러 고독에서 벗어나려 하지 않고 기다림으로 채워간다는 것입니다 비어 있어야 비로소 가득해지는 사랑 영원히 사랑한다는 것은 평온한 마음으로 아침을 맞는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것은 몸 한쪽이 허물어지는 것과 같아 골짝을 빠지는 산울음소리로 평생을 떠돌고도 싶습니다 그러나 사랑을 흙에 묻고 돌아보는 이 땅 위에 그림자 하나 남지 않고 말았을 때 바람 한 줄기로 깨닫는 것이 있습니다 이 세상 사는 동안 모두 크고 작은 사랑의 아픔으로 절망하고 뉘우치고 원망하고 돌아서지만 사랑은 다시 믿음 다시 참음 다시 기다림 다시 비워두는 마음으로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으로 찢긴 가슴은 사랑이 아니고는 아물지 않지만 사랑으로 잃은 것들은 사랑이 아니고는 찾아지지 않지만 사랑으로 떠나간 것들은 사랑이 아니고는 다시 돌아오지 않지만
비우지 않고 어떻게 우리가 큰 사랑의 그 속에 들 수 있습니까 한 개의 희고 깨끗한 그릇으로 비어 있지 않고야 어떻게 거듭거듭 가득 채울 수 있습니까
영원히 사랑한다는 것은 평온한 마음으로 다시 기다린다는 것입니다.
도종환/당신과 가는 길...
별빛이 쓸고 가는 먼 길을 걸어 당신께 갑니다 모든 것을 다 거두어간 벌판이 되어 길의 끝에서 몇 번이고 빈 몸으로 넘어질 때 풀뿌리 하나로 내 안을 뚫고 오는 당신께 가는 길은 얼마나 좋습니까 이 땅의 일로 가슴을 아파할 때 별빛으로 또렷이 내 위에 떠서 눈을 깜빡이는 당신과 가는 길은 얼마나 좋습니까 동짓달 개울물 소리가 또랑또랑 살얼음 녹이며 들려오고 구름 사이로 당신은 보입니다 바람도 없이 구름은 흐르고 떠나간 것들 다시 오지 않아도 내 가는 길 앞에 이렇게 당신은 있지 않습니까 당신과 가는 길은 얼마나 좋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