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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태주 산문집 중에서... (훔쳐보는 얼굴이 더)

꿈꾸는해바라기 2014. 5. 1. 06:24





어쩌면 우리는 지금 모두가 남들한테 홈쳐봄을 당하며 살아가

고 있는 건 아닐지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누구한테 훔쳐봄을 당

했으면 좋겠다는 바램으로 살아가는지도 모릅니다. 이러한 성향

과 요구는 여성들에게 더 강하지 않겠는가 싶습니다.

여성의 화장, 여성의 헤어스타일, 여성의 옷차림 등이 그것을

말해주는 것이 아닐까 모르겠습니다.

 

누구인가 나를 훔쳐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그것은 확

실히 우리에게 생동감을 안겨다 주는 삶의 청량제가 될 수도

있습니다.

나는 드디어 성가시게 내리는 출근길의 봄비를 원망하지 않기

로 했습니다.


왜냐하면 비로 하여 창밖의 풍경을 보지 못한 대신 거울 속

에 비쳐진 어여쁜 처녀의 얼굴을, 그것도 껌을 씹는 귀여운 얼

굴을 훔쳐볼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주었음으로서입니다.

조금은 악취미스럽지만 때로 우리가 세상 살 재미가 없어지면

누군가를 훔쳐볼 일입니다. 그것도 거울에 비쳐진 모습을 그 쪽

이 눈치채지 않게 몰래 훔쳐볼 일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사는 세상이 시시하거든 나의 모습을 누군가

이 시각 어디선가 훔쳐볼 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볼 일입니다.

생각이 이쯤에 이르면 우리의 핏줄 속의 피톨들이 기쁘게 소

리내며 흐르고 우리의 근육은 생동감을 되찾아 용수처럼 탄탄

해질 것입니다.



나태주 산문집 '추억이 말하게 하라' 213~215

 훔쳐보는 얼굴이 더

 

봄비가 내리고 있었습니다. 출근길 아침에 내리는 봄비는

여간 성가신 것이 아닙니다. 옷자락이 젖을락 말락 오는 봄비,

우산을 들고 줄을 서 있다가 우산을 접고 버스에 올랐습니다.

차안은 출근길의 직장인과 등교길의 학생들로 붐볐습니다.

노선이 같은 관계로 대개 그 방향의 직장인과 학생들이 타기

마련인 버스, 이른바 출근버스입니다.

 

그럼으로 해서 학생들은 모르지만 어른들은 대충 그 얼굴에 그

얼굴, 낯익은 얼굴들입니다. 한 두어달 같은 차를 타고 다니다

보면 서로 가볍게 목례를 할 정도로 낯이 익게 마련입니다.

앞에서 세 번째인가 네 번째인가 자리에 앉았습니다.

 

유리창이 뿌옇게 흐려져 창밖의 풍경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봄철인데 그 고운 꽃들이 모두 다 젖겠구나. 요즘 며

칠 여기저기 피어난 꽃을 보는 재미로 살아가는 나에게 꽃을

보지 못함은 여간 섭섭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섭섭한 마음으로 무심히 운전기사석 앞에 달린 조그만 거울을

바라보았습니다.

 

문득 거기 한 고운 얼굴이 비쳤습니다.

운전기사 바로 뒷좌석에 앉은 여자 승객의 얼굴이었습니다.

보건대 종점에서 출근버스를 탈 때 가끔 만난 바 있는 처녀

였습니다. 직장까지는 몰라도 나와 같은 시각 같은 버스를 타고

가다가 왕릉 입구 정류소에서 내리곤 하던 처녀였습니다.


그녀는 흰 바탕에 검정색 줄이 간 원피스를 입고 있었습니다.

운전 기사의 거울 속에는 그녀의 옆 얼굴의 일부가 숨어 있

어었습니다.

거울 속의 그녀의 조그만 입술이 껌을 씹을 때마다 보일 듯

말 듯 움찔거렸습니다. 허나, 껌을 씹는 그녀의 그러한 입술이

하나도 천박하게 보이지 않고 오히려 귀엽게 보이는 건 왜였을

까... (아마도 내가 잠시 그녀한테 홀렸던가 봅니다)

나의 눈이 자꾸 거울 속으로 빨려들어갔습니다.

 

어쩌면 저렇게 귀엽고 어여쁜 입술이 다 있을까... 나의 눈은

그녀의 입술에 가 고정되다시피 했습니다. 이름도 모르고 집도

모르지만 버스를 기다리다가 종점 부근에서 가끔 보아온 그녀,

그녀가 그토록 어여쁘다는 것을 깨닫게 해준 것은 다름 아닌

거울이었습니다.

 

거울에 비쳐진 얼굴, 그것도 훔쳐본 얼굴,

나는 언뜻 그녀의 얼굴을, 그것도 껌 씹는 그녀 입술을 훔쳐

보는 나의 눈길이 그녀한테 들키면 어쩌나 염려되는 마음이 들

었습니다.

그래 눈길을 다른 데로 돌렸지만 어쩌는 수 없이 나의 눈길

은 어김없이 다시 거울 속의 그녀 얼굴, 그것도 입술에 가 꽂

히곤 했습니다.

 

훔쳐본다는 것, 그것은 좀은 상스러운 행동입니다.

허지만 우리는 훔쳐볼 때 그냥 정상적으로 보는 것보다 몇

배 더 큰 감정의 출렁임을 맛보게 됩니다. 짜릿한 흥분에 휩싸

이게도 됩니다.